티스토리 뷰

생각

일본, 담배, 영락물

마비에 2022. 10. 18. 21:30

https://www.youtube.com/watch?v=Mrk1AIP1EeI

시이나 링고 - 폴터가이스트

 

 일본에는 어떤 정서가 있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만의 정서가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냐만은 일본이 일본이라서 특이한 것은 어찌 됐건 우리가 일본 문화를 보고 자라온 세대이기 때문이다. 내게 일본 하면 떠올리는 소리는 여름철 매미가 우는 소리다. 짱구나 코난 같은 초중학교 때 많이 보던 애니메이션에선 여름이 배경이면 방영시간 내내 매미가 우는 소리가 뒤에 깔려 있었고 그게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한국 매미는 울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매미 울음소리만 들으면 일본이 생각난다.-일본감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영상화 하는 데에 장인이 된 영화 감독 이와이 슌지의 최신작 <라스트 레터>에서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매미 소리를 영화 전반에 집어넣으며 과거를 바라보게 했던 걸 생각하면 일본인들의 생각에도 매미 울음소리는 특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혀 시티팝이 아닌 노래를 시티팝이라고 우기는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의 댓글들이 어째서 80년대를 지나온 적도 없는데 이 노래들을 들으면 80년대를 그리워하는지 궁금해하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생각보다 꽤 정확하다. 경험해본 적 없는 것에 대한 향수가 일본이 가지고 있는 정서의 정체다.

 매미 말고도 이런 것들을 따지자면 끝도 없다. 서울에서는 외대앞역 말고는 찾을 수 없는 열차 건널목,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 8시면 문을 닫는 가게들, 현금 때문에 두꺼워진 지갑 등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담배를 피워도 되는 실내 음식점. 담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오늘은 편의점 앞 재떨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웬 백발의 할아버지께서 내 옆에 다가와 불을 붙이고는 말을 거시기 시작했다. 발음이 좀 새시는 것 같고 사투리도 많이 섞여있어 알아먹는데 힘이 들었지만 대충 담배의 효능, 효험에 관한 일장연설이었다. 본인은 담배를 50년을 피웠는데도 아무렇지 않다, 커피나 밥 먹고 담배를 한 모금하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그런데 요즘은 담배 피우기가 참 힘들다. 뭐 그런 이야기였는데, 노인이 하는 이야기에 이 정도로 공감한 일이 잘 없어서 반가웠다. 지금 시대에 흡연자는 말하자면 핍박받고 있는 존재긴 한데, 혐연권이 흡연권에 우선한다는 핍박의 논리가 반박의 여지없이 정당하기 때문에 어디 따질 곳도 없어 더 서럽다. 하지만 핍박받는 것은 여전하기에 일본에서 담배의 효능, 효험을 말해주는 할아버지께 나는 연대의식을 느꼈다. 할아버지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말을 걸어주셨던 것으로 생각한다.-덧붙여 한국에는 식후땡은 불로장생이란 속담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할아버지께서는 흡족해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흡연자에게 천국 같은 곳이어서 실내 자리에 앉아 흡연이 가능한 밥집이나 카페가 아직 남아있다. 이건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과제를 하며 담배를 폈다는 아버지로부터 듣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내 손으로 실현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또, 내게 ‘너네 시대가 아무리 좋아졌다지만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담배를 필 수 없으니 불쌍하고 하나도 부럽지 않다’라던 외삼촌이 도대체 얼마나 좋은 시대를 살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카페에 앉아있다 담배를 피러 나가려 문을 열었다가 ‘안녕히 가세요’란 인사를 당하고 다시 들어올 때 ‘어서 오세요’란 인사를 또 당해 정상적인 인사를 포함해서 도합 4번 이상의 인사를 받느라 무안할 일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마쎄 또는 메비우스 스카이 블루라고 부르는 메비우스 슈퍼 라이트를 편의점에서 로쿠쥬우고반 오네가이시마스라고 말하고 산 뒤, 담배를 앉은자리에서 핀 경험이 어땠느냐 하면 생각만큼 좋았다. 커피 맛을 유난을 있는 대로 떨며 따져대는 나지만 커피맛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고, 카페인과 니코틴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격했다. 조금만 더 호들갑을 떨어도 좋다면 담배를 피우면서 책을 읽는 순간에 버지니아 울프, 프랑수아즈 사강 같이 항상 담배를 물고 다녔던 작가들의 문장을 떠올렸다. 막상 읽고 있던 책은 헌법에 관한 이성적인 책이었는데도 유난히 감상적인 작가들을 떠올린 데에는 역시 담배가 한몫을 했을 거다. 아무튼, 그들이 살던 시대에 작업실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면 버지니아 울프의 그 빛나는 문장들, 이를테면 “이제는 모든 것이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문지방에 발을 올려놓은 채 그녀는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사라져 가는 그 장면에서 잠시 더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몸을 돌려 민타의 팔을 잡고 방을 나서자, 그 장면은 달라졌고, 다른 형태를 띠었다. 어깨 너머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돌아보면서 그녀는 그것이 이미 과거가 되었음을 알았다.(등대로 중)”같은 문장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들은 대학들이 고시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고시반이니 인강 지원이니 하는 걸 다 그만두고 어차피 고시생의 흡연률이 높은 것이 상식인 마당에 흡연이 가능한 자습실을 만드는 게 합격자를 늘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으로까지 이어진다.

 프랑스의 철학가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영락물(the abject)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영락물은 손톱, 발톱, 가래, 눈곱, 땀처럼 아무리 잘 제거하더라도 삶을 영위하는 한 생겨버리는 찌꺼기나 부산물을 의미한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거리 곳곳에 쓰인 ‘금연’ 표지판을 보며 이 개념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금연 싸인 밑에는 보란 듯이 담배꽁초들이 널브러져 있고 벌금을 아무리 세게 때려도 벌금을 이유로 흡연을 그만두는 흡연자는 본 일이 없다. 그럼에도 깨끗한 거리 만들기와 국민의 건강권이라는 기치를 필두로 한 금연, 혹은 흡연자 핍박이란 국가적 사업은 정당하다. 그런데 금연구역을 늘리고 흡연 부스 안으로 흡연자들의 존재를 숨긴다고 정말 세상이 좋아질까. 흡연 역시 세상의 영락물이라 아무리 박멸하려고 해도 바퀴벌레처럼 어딘가 으슥한 곳이 있다면 모여서 연기와 꽁초를 만들어 낼 것이다. 사회는 더러운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싶다고 하지만 깔끔한 것들만 남은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자라는 손톱처럼 더러움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러움은 깔끔함의 반대, 혼란은 질서의 반대이지만 이 반대 개념은 언제나 붙어 있다. 깔끔한 선진국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선진국이 착취하는 더러운 후진국이 있기 때문이고, 깔끔한 서울이 있는 것은 서울이 만들어내는 영락물(이를테면 쓰레기, 원전 등)을 가져다 놓은 더러운 지방이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담배를 “삶이라는 전투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참호이자 무기”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소득자의 흡연율이 유의미하게 높은 것은 그 삶의 고달픔과 관련 있다. 또한 이 박해 속에서도 남아있는 흡연자는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상식을 기치로 든 국가-자본 권력의 통치에 대한 저항자다. 대중이 건강과 청결에 열중하며 장수하는 부자가 되기를 바랄 때에 자본의 입맛에 맞는 노동자가 탄생한다. 최소한의 노동여건을 요구하던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더러운 파업이 불법으로 규정되어 몇백억의 손배소를 맞아도 그 과정이 불법(=더러움)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인식, 또는 사람이 죽어 선혈이 낭자한 소스 배합기 옆에서 합리적으로 제품을 생산해내게 했던 빵 공장처럼 말이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하면, 일본을 찾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정서나 매력은 흡연할 수 있는 식당에 있다는 말이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아날로그적 매력이 플랫폼의 어디에 서야 할지 알 수 없는 스크린 도어가 없는 전철에 있고, 카드결제가 안 되는 프랜차이즈 식당에 있고, 걸음을 멈추게 하는 열차 건널목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나온 적 없는 일을 그리워하는 것은, 지나온 적 없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온갖 불결하고 비합리적인 것들이 깨끗하게 세탁된 좋은 것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여, 전원의 풍경을 보려 시골에 내려가면 갖가지 벌레를 견뎌야 하고, 경험한적 없는 것에 대한 낭만을 느끼려 일본에 찾아간다면 담배 냄새를 견뎌야 한다. 물론 이 모든 말들이 이 시대의 루저이자 병자인 흡연자의 궤변이고, 그럼에도 담배 연기가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은 맞지 않느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오사카 시내의 어느 흡연 카페에서

2022.10.17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